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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네 글과 자료

영농일지 :나만의 기록에서 나눔의 기록으로

by 박종관 2015. 1. 13.

 

 

나만의 기록에서 나눔의 기록으로

 

 

                                                                                          2015.1.    박종관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나의 영농 일지는 올해 쓰기 시작한 영농 일지까지 굳이 따지자면 열여덟 권이 있다. 귀농의 짬밥(?)을 드러내주는 계급장 같아서 뿌듯할 것 같지만, 막상 나의 영농 일지 서랍을 열어보면 심란하기 그지없다.

흔하고 흔한 농협에서 준 영농 일지부터 시작해서 종류도 크기도 가지가지. 귀농 초기에는 아무래도 기록할 내용이 많다 보니, 농협 영농 일지 같은 형식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어떤 해에는 3년 영농 일지도 써보았는데 한 면에 3년치 같은 날 기록을 견주며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한 면에 6일 정도분의 기록밖에 쓸 수가 없어서 큰 흐름의 연간 비교가 막상 어려웠던 한계가 아쉬웠다. 그러다가 업체나 기업에서 주는 갖가지 다이어리들도 써보고, 어느 해에는 최대한 휴대하기 편하게 작은 수첩에도 적어보았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은 양지사의 하이플랜k8이라는 달력노트를 쓰고 있는데, 노트를 펼치면 에이쓰리(A3) 종이 크기의 제법 큰 한 달치 칸이 쳐져 있고, 열두 달 페이지가 끝난 뒤에 약간의 노트 페이지가 붙어 있다. 날마다 많은 양을 기록하기 힘든 단점은 있지만, 한 면에 한 달이 눈에 다 들어와서 전체 안목을 높여주는 장점이 있어서 몇 년 동안 잘 애용해왔다. 특히 쓸 내용이 많은 귀농 초기를 지나 귀농 수년이 흐르면서 농사일의 내용도 해마다 되풀이되고, 차츰 기록이 귀찮기도 할 때쯤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형태여서 최근에 계속 써왔다.

아무튼 짧지 않은 농사 햇수에도, 해마다 영농 일지 양식과 크기도 제각각 주먹구구식이고 거기에 해를 거듭할수록 기록하는 성의도 줄어드는 요즘, 2015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올해는 어떻게 기록을 할 것인가가 숙제처럼 남아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귀농통문지난호 특집인 농사 일지는 나의 오랜 숙제를 정리하는 데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되었다. 네 분 저자들의 경험담이 모두 특색있고 나름대로 배울 것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전업농인 나에게 더욱 감명있게 다가온 글이 김진강 님의 영농 일지 작성기였다. 저자 특유의 농사 일상과 정보에 대한 꼼꼼하고 체계적인 메모와 정리도 인상적이었지만, 내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가장 큰 것은 저자 자신의 농사 기록들을 명확하게 데이터로 만들고 자료로 만드는 데 있었다.

왜 농사 기록들을 데이터화하고 자료화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것은 저자가 말한 대로 영농 일지는 지나간 것의 기록의 의미를 넘어 지금 현재에 가장 필요하고 정확한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농사 일상의 기록은 비록 주먹구구식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해왔던 터다. 그러나 그것이 해마다 한 권 한 권 끝나는 것에서 멈추었고, 기껏해야 지난해 이맘때쯤 뭐 했나 궁금해서 영농 일지를 이따금 들춰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한 해 영농 일지 한 권이 마무리되면서 그 안의 수많은 기록을 수치화하고 정보화하고, 그런 정보들을 해마다 쌓아서 하나의 흐름으로 잡아보지는 못해왔다. 그 정보들의 흐름이 바로 개인의 농사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인데 말이다. 물론 농사라는 특성상 수치화하고 정보화하지 못하는 영역은 엄연히 존재하기에 농사의 그런 가치 영역은 따로 일기나 회고록 같은 형식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정말 돌아보고 배운 것이 있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가치적인 정리는 잘 했지만, 정확한 수치와 자료들을 근거로 내 개인의 농사 역사를 정리해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농 일지의 뽕을 뽑다

올해 초 내 삶의 화두가 영농 일지에 이왕 꽂힌 김에 판을 좀 키워서, 지역의 내가 속한 귀농 모임에서 영농 일지를 주제로 같이 모이는 것을 준비했다. 세 번에 걸쳐 모였는데, 첫 모임 때 앞에서 말한 귀농통문의 지난호 저자인 김진강 님을 초대해서 농사꾼이 들려주는 영농 일지 기똥차게 쓰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손수 몇 년 동안 써왔던 수기 영농 일지뿐만 아니라 해마다 데이터화한 엑셀 자료까지 보여주면서, 지면으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세밀한 이야기까지 더했고, 구체 농사에 관련된 수입·지출·결산 부분까지 가감없이 이야기해주셨다. 강의에 참석한 분들은 갓 귀농한 몇 달 차 귀농자부터 10년이 넘는 귀농자까지 다양했고 저마다 다양한 형태로 영농 일지를 써왔던 분들인데 그분들의 공감과 반응은 놀라울 만큼 좋았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우리들의 영농 일지라는 제목으로 우리 모임에서 꼼꼼하게 영농 일지를 써왔던 회원들 네 사람에게 사례 발표를 부탁했다. 첫 번 모임으로 영농 일지에 대한 동기 부여는 충분히 된 것 같았지만, 김진강 님은 다양한 밭작물 중심의 농사 형태인데 반해, 우리 지역 특성상 포도 농사를 중심으로 과수작목에 집중되어 있고 좀더 우리 지역과 우리 작목에 어울리는 영농 일지 형태를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네 사람의 영농 일지 발표 또한 영농 일지 하나 가지고도 정말 다양한 관점과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고, 우리에게 어울리는 영농 일지 형태를 찾는 중요한 소재들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두 번의 모임을 함으로써 정리된 것은, 수기 영농 일지는 하루하루 성실히 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컴퓨터나 모바일 기술이 발전하고 요긴하다고 해도 손으로 쓰는 기록의 중요성은 줄어들 수 없다. 그리고 그 기록은 나중에 데이터화하고 자료화하는 데 가장 기초 자료이기 때문에 버릇을 들여서 날마다 써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핸드폰으로 그때그때 영농 사진들을 찍어 놓으면 더 훌륭한 자료가 된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고 나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 엑셀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자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최종으로는 연말에 엑셀 내용을 취합하고 분류해서 한 해의 농사 보고서 형태로 만들면 좋다는 것. 그래야 그런 자료들이 쌓여서 개인 농사 역사의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모임은 엑셀을 이용한 포도농사 영농 일지 매뉴얼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이전 모임의 취합 결정판이다. 우리 지역에 갓 귀농해서 우리 모임에 새로 가입한 전 귀농본부 활동가였던 이은주 님이 맡았다. 5년 동안 귀농본부에서 갈고 닦았던 자료화 기술과 엑셀 활용을 기반으로 첫 번째, 두 번째 모임에서 나왔던 영농 일지 작성의 중요한 소재들을 종합해서 우리 지역에 최적화한 영농 일지 매뉴얼을 엑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다 같이 배우기로 했다. 지역의 정보화마을 컴퓨터 교육장을 빌려서 저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며 배울 계획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이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전국귀농운동본부 누리집에 첨부파일로 붙여 놓겠으니 내려받기를 하시면 될 것 같다.

 

영농 일지 나눔 모임

앞에서 말한 귀농 모임 소개를 하고 싶다. 지난해 2014년도 초에 중화지역 유기농 공부방이라는 지역 귀농자 모임을 하나 꾸렸다. 공부방 모임이라는 이름이 내포하듯이 소그룹 형태의 모임을 지향하며, 2회 모여서 개인의 영농 일지와 영농 사진 들을 서로 나누고, 필요한 농사 주제를 정해서 공부를 하는 모임이다. 모임을 꾸리게 된 계기는 일단 먼저 귀농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도 있었고, 귀농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위에 농사와 관련된 교육 모임들에 참석해보면 대부분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집단교육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이러한 교육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만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상호교류하지 못하고 일방으로 내용을 전달받는 측면이 있고, 개인의 실제 농사 실력과 형편에 맞는 단계적 실전지침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특히 유기농을 희망하는 귀농자들이 많지만, 특히 과수작목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구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몰라 마음으로만 희망하고 막연한 미래로 미루는 분들이 많다.

이러한 한계와 어려움을 풀 수 있는 것은 큰 모임이 아니라 작은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작아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모임. 서로의 눈높이에서 서로 이끌어줄 수 있는 모임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통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저마다의 농사 현장에서 얻어진 경험의 결과물인 영농 일지였다.

영농 일지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소재라고들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훌륭한 공동체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영농 일지가 나만의 기록에서 나눔의 기록으로 바뀌었을 때 모임에 얼마나 큰 촉매제가 되는지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경험할 수 있었다. 귀농자라는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시행착오들과 그 결과물들이 고스란히 서로 나누어질 때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과거 이야기도 되고, 현재의 내 모습도 되고, 앞으로의 내 모습도 되는 묘하게 끈적한 동질감이 형성되는것 같았다. 농사란 때를 맞추어 일하는 것이 중요한데, 서로의 농사 일정들을 참고하며 자기 농사 시기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농사 형편들을 나누다가 일이 너무 뒤처진 벗이 있으면 시간이 되는 이들이 품앗이로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신뢰가 바탕이 되자 공부할 때 이론과 기술적인 내용도 깊이있게 진행될 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농사 현장과 동떨어진 농사 이론과 기술만을 공부했다면 평범한 공부 모임으로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영농 일지를 매개로 삶을 공유하며, 함께 모여 공부하고, 유기농자재도 함께 만들었다. 그리고 배울 수 있는 여러 현장도 함께 탐방하면서 점점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우리 회원 가운데 두 가족이 포도로 무농약 인증을 받았고, 올해도 두 가족 정도가 준비하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 영농조합이나 협동조합으로 가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급하게 가고 싶지 않고 지금 당장은 좀더 내실을 기하고 싶다.

우리가 모인 지 일 년이 된 요즘, 모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둘레에 함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본으로 작은 소그룹을 지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찌 보면 폐쇄적인 모임이다. 두 가지 가치가 부딪치고 있다. 해결책은 더욱 작게 분화하는 것이다. 지금은 몇 개의 면 단위를 아우르는 지역 단위인데 앞으로의 계획은 면 단위로 더 작게 분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래서 삶과 농사를 더욱 생활로 공유하고 밀착할 수 있는 규모의 작은 모임이 되는 것. 그러면서도 면 단위마다 작은 모임들이 생기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임의 밑바탕엔 영농 일지 나눔이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영농 일지가 충실한 나의 기록이 되기를 그리고 이웃들과 나눔의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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